서울-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1909년-1949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1909년 2월.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1854-1933) 주교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두 명의 선교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서울 백동(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터를 잡고 수도원을 세웠으며, 숭신학교(사범학교)와 숭공학교(실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1913년 서울 수도원은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와 제1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선교 활동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1920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신설된 원산 대목구의 사목 활동을 서울 수도원에 맡겼습니다. 1927년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하여 수도원은 함경남도 원산 인근에 있는 덕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이후 덕원 수도원은 함경도와 북간도 지방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의 복음화 임무를 수행하며 문화, 영성,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덕원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본당 사목을 펼쳤고, 신학교를 운영하여 수많은 방인 성직자를 길러 냈으며, 농업·출판·문화 분야에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덕원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독일인 선교사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처형되거나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되어 희생되는 등 모진 시련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1928년-1946년)
덕원 수도원이 관할하던 원산 대목구의 관할 구역은 만주를 가로지르는 쑹화강(松花江) 하류에 이를 정도로 광활했습니다. 북간도 지방에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진출하기 전에 이미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 북간도 지방에 연길 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연길에 교구청의 역할을 담당한 선교 본부가 들어섰습니다. 연길의 선교 본부는 1935년 정식 수도원으로 발전하여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였고 연길 지목구 역시 1937년 대목구로 승격되었습니다.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 등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연길 수도원은 본당 사목과 교육 사업, 전례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냈습니다. 1946년 중국 동북 지방에 수립된 공산정권에 의해 연길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독일인 선교사들은 남평 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고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1952년-현재)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에서 쫓겨난 한국인 수사들은 남한으로 피신했습니다. 곧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들은 피난 수도인 부산에 다시 모여 공동체 생활을 재개했습니다. 1952년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호의로 한국인 수사들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그 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파견된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정식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왜관 수도원은 196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북한과 만주에서 뿌리가 뽑힌 수도생활은 남한에서 다시 새싹을 틔우고 훌륭하게 자라났습니다. 왜관 수도원은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감목 대리구(1956-1986)를 운영하며 지역 교회가 요구한 선교, 교육, 문화, 사회사업을 활기차게 펼쳐나갔습니다.

2009년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한 왜관 수도원은 재도약의 시기를 맞이하여 베네딕도회 영성을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교회와 세상에 영적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왜관 수도원은 본원과 한 곳의 원장좌 예속 수도원 그리고 네 곳의 분원에서 110여 명의 수사들이 사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며 수도생활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