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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 제2독서: 로마 8,31ㄴ-39 / 복음: 루카 9,23-26

생명과 구원의 길
<순교적 삶>
“사랑하라, 자기를 버려라. 제 십자가를 지라, 주님을 따라라”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사랑하는 임을 위해 온 삶을 바치고 싶은 열정을 지닙니다. 지극한 주님 사랑의 표현이 순교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하며 주님 위해 몸 바친 순교자들은 <사랑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자작시 두 편도 나눕니다.

“내 사랑하는 임은

뙤약볕 아래

큰 나무 그늘 같은 분이시다

무더운 날

시원한 바람 같은 분이시다

사막 같은 세상

샘솟는 우물 같은 분이시다”<내 사랑하는 임은; 2009. 8. >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땅

언제부턴가 자리 잡아

청초하게 피어난

달님 사랑만으로 행복한 샛노란 달맞이꽃들

아무도 부럽지 않다

사랑하는 임을 찾아 사막을 찾았던

순교자들의 후예 수도자들 같네”<임 사랑만으로 행복한; 2009. 8. >

참으로 순교자들을 닮아 하루하루 날마다 순교적 열정의 <임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9월20일은 9월 순교 성월의 절정인, 참으로 자랑스러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주일에 대축일로 지내지만 평일이라면 전 세계 교회가 의무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2003년 잠시 미국 수도원에 머물 때 이날 축하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이용하는 영문판 매일미사책에 소개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 축일은 19세기 여러 번의 박해 동안 그들의 생명을 바쳤던 <코리아Korea>의 103위 순교자들을 기념한다. 세 주교와 여러 사제들 외에도, 이 순교자들은 모든 세대를 망라한 영웅적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코리아 여행 중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그들을 시성했다.”

안드레아 신부는 25세 꽃다운 나이에 순교했고 바오로는 46세 절정의 중년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짧게 살았어도 100% 사랑으로 연소시킨,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새삼 오래 많이 사는 것이 자랑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명이 순교하였으니 세계가톨릭교회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땅인 한국 땅이요 전 국토에 널려 있는 순교성지가 마치 나라 전체가 성지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니 한국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한국의 순교성인들은 비단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한국과 한반도 전체의 <수호성인들>이라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 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의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가 실현되어 한반도에 영원한 주님의 평회가 계속 되리라 믿습니다. 정말 한국가톨릭교회의 자부심인 순교성인들이요 우리 가톨릭신자들안에 면면히 계승되는 순교영성의 유전인자(DNA)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생명과 구원의 길인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지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주님은 누구나에게 열린 구원과 생명의 길을 천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첫째,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십시오!

초대교회 신도들을 대변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주님의 위한 사랑을 들으면 저절로 주님 사랑이 샘솟는 듯합니다. 늘 인용해도 가슴 뛰게 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라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주님 사랑 체험이 샘솟는 주님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둘째, 자기를 버려십시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이 자기 버림이요 자기 비움입니다. 한두 번 버림이 아니라 날마다 이기적 나를 버려가는, 비워가는 겸손의 수행에 평생 충실할 때 참 나의 실현과 더불어 내적으로 자유로워지고 넉넉해지는 텅 빈 충만의 참 행복입니다.

셋째. 제 십자가를 지십시오!

끝까지,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그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내 운명의 십자가를, 내 책임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이 또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참 나의 실현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해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이래야 삶의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됩니다.

넷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따름의 여정>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방향이요 길이요 희망이자 꿈이요 비전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중심이요 삶의 궁극적 의미입니다. 이런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지혜로운 분별력의 상실로 뿌리 없는 표류의 방황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온갖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은 날로 복잡해지고 힘들어 집니다.

지헤서의 말씀처럼 주님을 항구히 따를 때 선사되는 주님의 참 평화요 불사의 희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신뢰하여 따르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삽니다. 주님께서는 선택하신 우리를 돌보시고 은총과 자비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대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끝으로 자주 인용해도 늘 새로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座右銘>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