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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독서: 에페 4,1-7.11-13 / 복음: 마태 9,9-13

주님 따름의 여정
“예수님 중심의 일치와 성장의 아름다운 공동체 삶”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주도다.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도다.“(시편19,2-3)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다인 랍비 신비가 여호수아 헷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무명으로 지내다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존재로 살게 된다는 자각입니다. 늘 푸른 솔과 청초한 들꽃들 역시 부르심 받은 존재의 행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옛 자작시입니다.

“푸른 산, 푸른 솔 외롭다는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푸른 들, 들꽃들 청초함 자랑하는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하늘 품 안에서, 하늘 향해

늘 고요히 푸른 솔로, 청초한 들꽃으로 머물 뿐이다

은은히 퍼지는 맑고 향기로운 침묵의 향기

존재의 향기, 하늘의 향기“<존재의 향기, 하늘의 향기;1998.9.2.>

하늘을 주님으로 바꾸면 우리의 신원은 분명해집니다. 주님 품 안에서 주님을 향해 주님의 향기를, 존재의 향기를 발하며 사는 주님 제자로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려 28년 전이니 50세 때 자작시입니다. 28년 동안 변화가 참 눈부시지만 놀랍고 고맙게도 푸른 산-푸른 솔, 푸른 들-청초한 들꽃들은 고맙게도 여전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사 저 또한 변함없이 여전합니다. 오랜만에 수도원을 방문하는 분들의 이구동성의 진심의 반응은 똑같습니다.

“여전하시네요, 늘 이 자리에 있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끝까지 오래 살아 주십시오.”

어떤 분들은 갑자기 제 <집무실>문을 열어보고 제 존재를 확인한 후 <그대로>라며 너무 신기해하고 기뻐하고 반가워합니다. 한밤중 강론을 쓰면서 성실하고 착하게 사시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형님들의 사진을 보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계실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에 여전히 푸른 삶을 사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리로 지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복음 서두 <부르심과 응답>의 말씀이 한 폭의 그림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짧은 단락 안에 얼마나 풍부한 의미를 닮고 있는지요! 예수님은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본질을 직시하시는 분입니다. 삶의 방향 없이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태오의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요 참으로 운명적인 섭리 은총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첫눈에 반해 마태오를 부르셨고, 역시 첫눈에 구원자 예수님께 반한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앉다-일어나다-따르다> 일련의 동작이 주님 향한 역동적 삶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마침내 방황은 끝났고 <구원의 출구> 주님을 만나 이제부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아, 주님을 만나지 못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평생 앉아 머물러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평생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마태오가,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 인생 전개됐을까요? 그러니 마태오나 우리의 부르심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놀랍고 고마운 주님의 섭리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뿐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입니다. 끝까지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할 때 늘 건강한 <푸른 삶>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따름의 여정은 <혼자와 더불어>의 여정임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제자들 공동체로의 부르심이요 식탁에서 공동식사로 부르심이 시작됨을 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이 예리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순전히 이들의 무지와 무식에 오해의 소치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의 공동체 한가운데가 <예수님의 제자리>임을 잊은 것입니다. 제자들을 대변한 예수님의 통쾌한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할 진리입니다.

“튼튼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나 이제나 주님 제자들의 공동체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요, 건강한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란 병든 이들의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죄가 없고 건강하게 잘나서 부르신 게 아니라 죄인과 병자이기에 목자이자 의사이신 자비하신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죄인이나 병자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참으로 <겸손과 섬김>의 제자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합니다.

혼자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바오로 사도가 고맙게도 친절히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겸손과 인내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희망도, 그리스도의 몸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고, 주님도,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시며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각자 받은 은사에 책임에 충실함으로 다양성의 일치중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다음 묘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는 말 그대로 끝까지 한결같이, 성숙한 사람,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겸손한 공동체, 성인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주님의 평생교육을 통한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 말도 이야기도, 비록 소리 없어도,

그 소리 온 땅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 끝까지 번져가도다.”(시편19,4-5ㄱ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