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집회 27,30-28,7 / 제2독서: 로마 14,7-9 / 복음: 마태 18,21-35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을 사랑하라, 자비로워라, 분노하지 마라”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주님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하느님 중심의 삶은 아름답고 거룩한 인간 품위의 기초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눈뜨자 열어본 옛 중학교 동창 카톡방에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친구들아, 이 세상에서 진 빚이 있으면 다 갚고 가. 죽으면 기회마저 없어진다.”

무엇보다 부지런히 갚아야할 <사랑의 빚>입니다. 요즘 고백성사후 보속을 줄 때 기분이 좋습니다. 말씀처방전과 더불어 한 가지 꼭 드리는 보속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6,16-18). 말씀처방전의 보속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이렇게 지내면 9월이 끝나면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오늘 지금부터 자기 전까지 화내지말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오늘 자기 전까지 화내지말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꼭 드리는 필수 보속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겠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자존심은 자기 고집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다산>

“군자의 잘못은 예로 막고, 소인의 잘못은 법률로 막는다.”<명심보감>

하늘을 우러러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깨끗한, 살아있는 양심의 참사람입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제 시에 대한 AI의 시평에서 어제 제목이 없을 때와 달리 <청초함>이라는 제목이 있을 때 내용이 참으로 깊었고 풍부했습니다. 시평을 전달해 준 자매와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제목이 청초함으로 바뀌니 시평도 놀랍게 바뀌네요. 제목의 힘이 대단합니다!”

“저도 신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삶도 주제. 제목이 있는 삶으로 이제부터라도 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큰 배움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아, 이래서 하느님 희망과 꿈, 비전을 지니자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에 최고의 제목이자 비전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예전 <나 하느님을 보았네>라는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나 하느님을 보았네, 하느님을 알았네

창문 밖 픙경을 통해

하늘이 하느님이라면 나무들은 사람들이었네

부드러운 미풍의 손길

따사로운 햇살 은총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 사랑

때로 어둔 하늘 몰아치는 폭풍우

이 또한 시련을 통해 나무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하늘 배려의 사랑

나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보았네 나는 알았네

하늘같은 하느님 배경에 나무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임을”<2007.8. >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하느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오늘 말씀에서 셋의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주님을 온 힘, 온 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우선적이 사랑이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마음도 정화되고 성화되어, 치유되어 주님을 닮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도 엊그제 신학생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을 배워라(Learn to remain with Jesus)”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주님 사랑의 대가,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바오로의 주님 고백에 이어 폭탄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하늘 안 나무들처럼 주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데 주님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인데 누구를 심판하고 누구를 업신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자비로울수록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습니다. 무한한 용서가 바로 이런 자비로은 삶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매정한 종의 비유가, 바로 하늘나라의 비유가 우리 모두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합니다.

만 탈렌트 빚진 자가 상징하는 바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탕감 받은 부자는 탐욕의 무지에 눈 멀어, 이것을 까맣게 잊고 자기에게 적은 빚을 지은 자에게 무자비라고 냉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에게 고발당해 문책당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어제 나눴던 죽을 때 후회된다는, “베풀걸, 참을걸. 즐길걸”이란 세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용서의 명령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집회서의 가르침도 일치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자비한 마음은 지체 없는 용서로 표현되며, 참으로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런 자비로운 용서의 은총을 주십니다.

셋째. 분노하지 마십시오.

이래서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뎌야 합니다. 자비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라 거의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와 온유의 선택, 훈련, 습관화에 온힘을 다 기울이기 바랍니다. 어리석게도 유혹에 빠져 분노로 인해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참지 못하고 분노의 폭발로 쌓아 온 신뢰를 순간 무너뜨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분노는 자신부터 큰 내적 손상을 입히기에 쉽사리 회복되지 않습니다. 또 대부분의 분노는 착각과 오해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제가 주는 “오늘 자기 전까지 화내지말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보속은 빛이 납니다. 오늘 집회서도 분노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이다. 죄지은 사람을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한마디로 결코 분노하지말고 <자비하고 온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분노하면 정의로워도 무조건 집니다. 분노의 산불이 나면 마음은 얼마동안 폐허가 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분노의 불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주님처럼 감정없이, 미움없이 화를 내야 하는데 이런 화는 사랑이기에 무해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다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위해 세 가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주님을 온 힘, 온 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2.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3.분노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시도다.”(시편10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