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10.6. 화요일 성 브루노 은수자(1030-1101) 기념일

갈라 1,13-24 루카 10,38-42

주님은 삶의 중심, 삶의 의미

“회개가 답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7-8)

살아갈수록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얼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두 말할 것 없이 믿는 이들에게 주님은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주님을 제외하고 아무리 인간품위를, 건강비결을 말해도 참 공허하게 들립니다. 대부분의 불행이나 병은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에서, 바로 주님 부재의 삶에서 기인됨을 봅니다.

경향신문(2026/10/2;12면) 한 면은 온통 “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제하에 중독에 빠진 분들의 치유를 위한 구체적 방법 세 가지 대원칙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1.시인하라, 내 삶조차 수습할 수 없는 무력함을

2.고백하라. 도덕적으로 망가진 내 모습을

3.참회하라. 내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들을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인, 그 중요한 <하느님>이 통째로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 중심의 삶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늘 강조하는 바 저는 인간 품위와 건강의 우선순위로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을 꼽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좋습니다. 건강할 때 하느님 중심의 삶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 두는 것입니다. 이 셋에다 <4.찬미하라> 추가한다면 얼마나 멋지고 완벽할 까 하는 생각도 번쩍 들었습니다.

제 <山과 江>이란 좌우명 시도, 다음 <행복기도>의 한 대목도 주님 중심의 삶을 강조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2018.10.16.>

하느님 중심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오래전 이때쯤 두 편 자작시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침 빛나는 태양 떠오르자

 부스스 잠깨는 숲 나무들

 햇빛 은총 가득 담고

 새로 시작하는 하루”<새로 시작하는 하루; 2008.10. >

 “하늘 향해

  활짝 사랑으로 피어난 게 꽃이다

  하느님 향해

  활짝 사랑으로 피어난 게 사람이다

  꽃같은 사람

  꽃같은 얼굴이다”<꽃과 사람; 2008.10. >

눈만 열리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회심과 더불어 더욱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고히, 새롭게 자리 잡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삶은 주님을 닮아 더욱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지고 자비로워지니 회개보다 <명품인생>에, 영육의 건강과 치유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회심의 대가이자 회개의 달인이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의 자랑스런 성인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결정적 주님과 만남의 회심후도 계속되는 회심의 여정을 살고 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죽을 때 까지,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예외 없이 참으로 믿는 자라면 회심의 여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10월6일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위대한 침묵> 영화로 유명한 카르투시아 수도회의 창립자인 독일 쾰른의 <성 브루노 은수자 기념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세상은 변해도 십자가는 우뚝 서 있다(Stat crux dum volvitur orbis)”

브루노가 지은 카르트시오회의 표어로 십자가의 예수님이 삶의 중심임을 천명합니다. 향년 71세쯤(1030-1101) 선종한 브루노는 사후 많은 신자들에 의해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습니다. 겸허함의 자세를 엄격히 준수하는 카르투시오회의 특성상 공식적으로 시복되거나 시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후 413년이 지난 1514년 교황 레오 10세가 그를 복자로 천명했고, 1623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그를 전례력에 넣음으로써 교회의 성인으로 천명합니다. 브루노가 설립한 카르투시오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제정된 규율과 전통이 유지된채 현재 프랑스를 포함한 전 세계 12개국에서 16곳의 남자 수도원과 5곳의 여자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두 교황의 평가와 성인의 어록을 일부 소개합니다.

“브루노는 유럽을 뒤흔들었던 문화적, 종교적 격변의 중인이자 내부적으로 곤경에 처한 교회가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을 설계한 인물이었다.”<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복음으로 충만한 브루노의 삶은 기도를 통해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남녀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있다.”<교황 프란치스코>

이어지는 성 브루노의 어록입니다.

“오, 아름답구나!”(O, Bonitas!) 

브루노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지을 장소를 처음 봤을 때 외쳤던 말마디입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자에게 가져다 주는, 그 유용함과 숭고한 기쁨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대의 행동으로 그대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여 주십시오.”

“깨끗하지 못한 영은 쉽게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쉽게 사람들 속을 빠져나갑니다.”

오늘 복음 역시 삶의 중심과 회개의 측면에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는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경청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며, 주님 말씀에 경청함으로 주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합니다. 

관상과 활동의 우열을, 마리아와 마르타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말씀의 경청입니다. 이래서 미사의 구조도 말씀전례후 성찬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마르타는 이점을 놓쳤습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분명 마르타를 회심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우선순위를 망각한 활동주의자들에게 경각심을, 회개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둘 다 <사랑의 환대>라는 점에서 우열을 비교할 수 없지만 우선순위는 말씀의 경청임을 마르타가 잊었습니다. 이를 알았다면 마르타는 주님께 불만을 토로하지 않던지, 또는 함께 주님 말씀을 경청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새삼 주님께서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바 경청의 환대임을 깨닫습니다.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이 하나로 이어지며 경청과 함께 가는 회개의 은총임을 명심해야합니다. 어찌보면 마리아와 마르타는 분리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양면입니다. 기도할 때는 마리아요 일할 때는 마르타요며, 밤에는 마리아로 낮에는 마르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모범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시편139,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