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아들로 둔 성모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신흥 종교의 지도자였고 성공을 보장받은 전도유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복음 속의 이 여인은 잘난 아들을 둔 어머니에 대한 부러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성공하여 잘 나가는 자식들은 부모의 명예를 드높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이 서당에서 배우던 소학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니라, 우리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머리카락 한 올 손 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게 몸을 간수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고,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 얼핏 보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가 마치 인생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읽혀집니다. 그러나 옛 성현들이 돈 잘 벌고 좋은 자리 차지해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일을 인생사의 전부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문구를 살펴보면 입신행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나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실천하는 것, 바른 길을 걸어가는 데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응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복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의 기준은 세속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부의 축척과 사회적 지위 상승, 그리고 그를 통해 누리는 안락한 삶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헤아려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자라고 믿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봅시다. 참으로 불쌍하신 분입니다. 저 위에 팬티만 입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예술적으로 표현하느라 팬티를 입혀 놓았지, 실제적으로 천 쪼가리 한 장 걸치지 못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삶을 마쳤습니다. 바로 이분의 우리 삶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 희생을 택했습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아들의 운명과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였고 심장이 칼에 찔린 듯한 상처를 지니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 길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복을 빌어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는데 있습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악령의 농간의 빠지지 않고 생명의 길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축복만을 청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가시밭길이라도 마다 않고 가야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네 인생은 그야말로 삽질의 연속일 따름입니다.
신자 분들이 종종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가지 기준을 알려드립니다. 첫째는 때입니다. 몸에 일어나는 때가 아니라, 시기를 말합니다. 이 일을 꼭 지금 해야만 하는가? 다른 시간으로 미룰 수는 없는가? 일의 적당한 때를 파악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능력입니다. 이 일을 내가 해낼 수가 있는가? 혹은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주위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깜냥도 모르고 일을 벌여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자아도취나 과대망상에 걸려 터무니없는 사업을 벌이다가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봅니다. 그 옛날 그리스의 테스 형님께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기 전에 자기 주제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때에 맞고 능력이 된다면 이제 마지막 기준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 일을 해내면 과연 누구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가? 오로지 나의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가족이나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가? 아니면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들에게 돌아가는가? 저는 어떤 일의 결과가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이 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 이왕이면 내가 모르는 이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갈 때, 대체로 그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일을 해야만 하고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고 그 일의 결과가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이익이 될 때, 그 일은 하느님의 뜻에 거의 부합한다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연휴인데 다른 데 놀러 갈까, 친구와 카페에 가서 수다나 떨까, 집에서 잠이나 잘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유혹을 떨치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여기에 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와보니까 어떻습니까?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 같아요? 첫째 때를 따져 봅시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나들이하기 딱 좋을 때입니다. 이제 절기가 한로 상강이라 조금 있으면 서리가 내립니다. 두 번째, 능력을 살펴봅시다. 누구나 충분히 올 수 있습니다. 자가용이 없어도 전철타고 버스 한 번 갈아타면 큰 불편 없이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세 번째 오늘 여기에 오면 누가 이익을 봅니까? 배 수확하느라 지친 수사님들을 도와주고 또한 후원회로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래서 여러분은 오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신 겁니다.
정말 장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우리 자신을 위하여 박수 한 번 칠까요? 네,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오셨습니다. 이 미사 마치고 점심 맛있게 드시고 울력도 재미있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잠시 침묵 중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 하루 우리의 모임을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채워주시기를 기원하며 미사를 계속 봉헌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