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발작 버튼입니다.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 바리사이들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질타를 받던 바리사이들은 원래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잡한 율법을 일반 사람들도 쉽게 지킬 수 있도록, 당대의 현실에 맞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선생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랍비’라는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천막 제조공이었던 사도 바오로처럼, 바리사이들 가운데는 장인 계층 출신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에는 약 6천 명의 바리사이가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농촌에서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에도 진출해 있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산헤드린 안에 바리사이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처형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렸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반대로 산헤드린에서 예수님 처형이 정식으로 의결되지 않자 대사제장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새벽에 기습적으로 본시오 빌라도를 찾아가 판결을 재촉했으리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서 사도 바오로가 증언하듯이, 바리사이들은 다른 유다인 집단과 달리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으며, 천사와 영혼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목수로 알려진 예수님께서 성경을 누구보다 명쾌하게 풀이하시고, 많은 군중이 그분을 랍비라 부르며 따랐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대립했다고 보는 기존의 시각은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일부 바리사이들은 왜 그렇게 호되게 비판받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표리부동, 곧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제도 종교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착한 척하면서 뒤로는 남을 헐뜯기. 열심한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뭔가 깨달은 척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 고상한 척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면서 사람들을 겁주기. 하기 싫은 일에 하느님을 핑계로 내세우기.

이런 모습은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종교가 보장해 주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그러나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인들의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이 만들어 내는 비뚤어진 욕망을 질타하십니다.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을 경계하고,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가르치십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고, 형식과 실질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겉을 꾸밀 것인가, 속을 채울 것인가?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기가 어렵다면, 한 가지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됩니다. 먼저 내실을 다지고, 그다음에 형식을 갖추면 됩니다. 그러면 의외로 문제가 간단하게 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먼저 마음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겉만 번드르르한 빈껍데기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내면을 충실하게 가꾸고, 삶의 내실을 다지는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삶이 허영과 위선으로 기울지 않도록 늘 깨어 자신을 성찰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인으로서, 저마다 받은 소명에 충실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