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서: 에페 1,11-14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고 여러분도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복음: 루카 12,1-7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제목: 하느님의 거룩한 도장
1. 세심한 셈과 참된 가치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대 의학이 끝내 풀지 못한 숙제가 바로 탈모입니다. 탈모 치료제를 제대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머리카락 한 올은 우리 자존심이 걸린 깊은 고민거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선언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 12,7) 머리숱이 적은 사람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세는 수고를 덜어서 편하셨겠다는 짓궂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전하고자 하신 참뜻은 하느님의 셈 실력이 아닙니다. 매일 머리카락이 빠지는 모습을 보며 속상해할 뿐 나 자신조차 정확한 개수를 모르는 그 사소한 부분까지 주님은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세상은 겉모습과 번듯함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 몸의 가장 작은 한 올은 물론 나이 들며 잃어가는 상실의 아픔까지도 따뜻하게 품어 주십니다.
2. 옛 인장의 의미와 신비
우리를 향한 이 세심한 사랑은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확실한 보증으로 이어집니다. 옛날 지중해 지역에서 ‘인장’은 중요한 계약 문서에 붉은 촛농을 떨어뜨려 도장을 찍거나 가축에 불도장을 새겨서 주인을 밝히는 공식적인 표식이었습니다. 이 표식이 찍힌 대상은 오직 주인의 보호를 받았고 세상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옛 풍습을 들어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정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생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직접 누리는 참된 은총입니다.
3. 견진성사와 성령의 인호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우리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신앙을 고백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표식인 ‘성사의 인호’라는 거룩한 도장을 직접 찍어 주셨습니다.
이 은총의 표식은 가톨릭 전례 안에 깊이 담겨 있습니다. 견진성사 때 주교가 오른손으로 안수하며, 같은 손 엄지에 축성 성유를 묻혀 견진자의 이마에 십자표를 그을 때 바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 이 전례 기도는 바로 오늘 에페소서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도장이 찍힌 가축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듯이 성령의 인호를 받은 우리는 세상 걱정에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성령께서는 훗날 우리가 들어갈 하늘나라를 든든하게 약속해 주는 확실한 보증이십니다(에페 1,14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히 아끼시는 하느님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살며, 삶으로 주님을 찬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