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서: 에페 2,12-22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복음: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제목: 장벽을 허무는 평화

1. 무너진 돌담과 한 가족

옛 예루살렘 성전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역을 철저히 가르는 ‘소레그’라는 돌담이 있었고, 그곳을 넘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무서운 경고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출신 이방인 트로피모스를 이 돌담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오해를 받아 군중에게 폭행당하고 체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만큼 이 돌담의 출입 금지 규율은 목숨이 오갈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오늘 에페소서는 바로 이 죽음과 배척의 돌담을 허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선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고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에페 2,15), 성령 안에서 전혀 새로운 인류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족이나 지인 사이에도 옛 성전의 돌담 못지않은 마음의 벽이 세워집니다. 한 번 틀어진 마음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남보다 못하게 지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에페 2,19)이라고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신자들은 건물의 중심인 ‘모퉁잇돌’이신 예수님께 단단히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함께 자라납니다. 이 말씀은 갈라진 세상이 하나 되는 일치의 바탕이자, 미사 때 서로 나누는 ‘평화의 예식’의 깊은 뿌리가 됩니다.

2. 허리띠와 켜진 등불

이렇게 마음의 돌담이 무너지고 한 가족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 평화를 지켜낼 깨어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언제든 즉시 움직일 수 있는 봉사의 준비와 어둠 속에서도 방심하지 않고 마음을 살피는 태도를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하신 말씀처럼, 깨어 있음은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내게 맡겨진 삶의 책임을 끝까지 다하는 성실한 준비를 의미합니다.

3. 시중드는 주인의 식탁

책임감 있게 일상을 지킨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약속하십니다. 주인이 오히려 스스로 띠를 매고 종들의 시중을 든다는 이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겸손과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미사, 곧 성찬례의 은총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라고 거듭 약속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친히 식탁의 시중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미사 중에 나누는 평화의 인사로 내 마음의 차가운 돌담을 먼저 허물어뜨리고, 성찬의 식탁을 차려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깨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