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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목요일(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그레고리오교황학자기념일 (연중22주간목요일)

1독서: 1코린 3,18-23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제목: 비움이 여는 참된 길

1. 자비 앞에 선 가난한 마음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선종일은 3월 12일이지만, 축일은 교황 즉위일인 9월 3일에 지냅니다. 선종일이 참회의 사순 시기와 자주 겹쳐, 교회의 위대한 목자를 온전히 기리기 어렵다는 전례적 고려에 따라 날짜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높은 신분과 재산을 버리고 스스로 수도자가 되었던 그는, 원치 않게 교황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이전처럼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겸손은 전례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서너 시간씩 이어지던 미사에서 장황한 청원기도를 과감히 덜어내고, 백성이 한목소리로 외치던 짧고 간절한 탄원만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사 첫머리에 가슴을 치며 바치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입니다. 인간의 언변을 걷어내고,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서서 오직 자비만을 청하게 한 참된 개혁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하느님의 말씀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고 가르쳤습니다. 말씀은 닫힌 문자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이의 삶 안에서 비로소 그 깊이를 더해 가기 때문입니다.

2. 어리석음을 택하는 자유

이처럼 나를 비워내는 겸손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전한 지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자신의 경험과 꾀를 앞세우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판 아집에 갇히고 맙니다.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주님 앞에서 기꺼이 바보가 될 때, 비로소 은총이 머물 빈자리가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인간적 계산을 내려놓은 영혼이 누릴 풍요를 분명히 선언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1.23) 나의 무력함을 솔직히 인정할 때, 세상의 불안은 물러가고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안을 넉넉히 채웁니다.

3. 말씀에 기댄 온전한 따름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말씀에 기대는 이 비움의 정점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완성됩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단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베테랑 어부의 기술과 경험이 바닥을 드러낸 ‘빈 그물’의 허탈함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대낮의 깊은 물은 어부의 상식을 벗어난 자리였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응답합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배가 가라앉을 만큼 넘쳐나는 물고기 앞에서 베드로는 그분의 무릎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거룩함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지 않고 내어놓은 영적 겸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비어 있는 마음을 꾸짖지 않으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며 제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죽지만, 세상이라는 죄와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영혼들은 말씀의 그물로 건져 올려져야만 참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빈 그물의 자리에서 주님을 온전히 따랐고, 그레고리오 교황 역시 그 겸손으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낡은 고집과 얄팍한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기대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그물을 내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