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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2026년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긴요한 일이 많지만, 그중에 숨 쉬는 일이 으뜸이고 그다음이 먹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숨 쉬는 일보다 먹는 일을 더 중히 여깁니다. 목숨을 부지하기만 하면 숨은 저절로 쉬어지기 때문입니다. 허나 밥은 곧 생명이라, 백성들은 밥을 하늘로 삼습니다. 예수님도 밥을 중히 여겼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같이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먹보와 술꾼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이니,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겼는지 알 만합니다. 또한 창녀나 세리같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밥상을 나누었으니, 무언가 뜻을 두고 하는 일임을 짐작케 합니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자고 먹는 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 밥상에서 한 솥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상호간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며, 때에 따라서는 운명까지 같이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밥상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제자들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밥상머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며 서로 섬기고 사랑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밥으로 내어 준다고 말씀하며, 당신과 나눈 마지막 밥상을 늘 기억하여 행하라는 유언까지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눔과 섬김이라는 새로운 식사법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여야 하는 삶의 방식, 곧 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상생의 삶을 제시했으며, 더 나아가서 나 혼자 죽어도 좋으니 모두가 살 수 있는 자발적 희생의 삶을 택하라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본능적으로 또는 관성적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일깨워줍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밥 먹는 일이 중하기는 해도, 숨 쉬는 일만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질기고 질긴 게 사람의 목숨입니다. 한 사나흘 밥을 굶어도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숨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삼 분 정도만 숨을 참고 있어도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숨을 참는 데 도사인 제주도 해녀들도 바닷속에서 물질을 하는 시간은 겨우 45초에서 85초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 목숨이 코끝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숨 쉬는 일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하는 현상과도 비슷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며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흥미롭게도 우리 조상들은 아기들이 머리로 숨을 쉰다고 믿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아기 정수리가 볼록볼록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숨골,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모든 양기가 모인다고 해서 백회혈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자라면 숨골이 닫히고 아랫배를 볼록볼록 움직이며 숨을 쉽니다. 이게 복식호흡 혹은 단전호흡인데, 배로 숨을 쉬어야 기운이 팔팔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은 배로 숨을 쉽니다. 복식호흡은 특별한 훈련을 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흉식호흡을 합니다. 가슴으로 숨을 쉬며 살다가 기운이 달리면 숨이 목에 걸립니다. 목에서 숨이 깔딱깔딱하다가 멎기 때문에 죽는다는 표현을 목숨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숨골이 닫힐 즈음에 아기들은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고 점점 영악해집니다. 그래서 아기가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이유가 숨골을 통해서 하늘과 소통하며 생명의 기운을 받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도 하늘과 호흡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솔직한 말투, 순수한 마음, 그리고 꾸밈없는 행동거지는 아이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복음 성경에 보면 어린이와 어울려 노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잊고 있었던 하느님의 숨결을 다시금 일깨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호흡에 맞춰 살아갔기에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성령이라는 새로운 하느님의 위격을 만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병들고 가난하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새로운 호흡법은 소통과 일치입니다. 너와 나가 완전히 소통되고 일치될 때 영이라는 신비한 힘이 나옵니다. 이 상태에서는 시간이 사라지며 고통을 잊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소통과 일치의 대상이 하느님이라면 여기에서는 거룩한 영, 곧 성령이 나옵니다. 이때 우리의 존재는 영원이라는 초월적인 차원으로 넘어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남의 죄를 용서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소통과 일치의 전제조건이 화해와 용서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으로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유훈을 되새겨 봅니다. 섬김과 나눔의 식사법과 소통과 일치의 호흡법. 이 두 가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형제와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 되고, 세상과 하나 되고, 하느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 친교와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수직적 친교가 만나는 그 지점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듯,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일치의 성령을 청하도록 합시다. 또한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특별히 낮고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뜨고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