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가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복음이 세상 속에 깊숙이 녹아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가치, 평화의 소중함, 화해와 용서의 필요성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알아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굳이 나서서 떠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의 존재가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인구의 40퍼센트 정도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가톨릭 신자만 6백만이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놓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룩될 날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정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를 움직이고,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데도, 시대는 더욱더 영적으로 후퇴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세상에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마음으로는 우상을 섬기고, 우리의 손과 발이 여전히 하느님과 이웃보다는 자신을 위해 먼저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위선적인 삶과 행동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가려면 이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신앙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시키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사소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본당에서 교리를 가르치시던 수녀님들은 식사 전에 성호를 긋는 것을 몹시 강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먹기 전에 성호를 긋는 것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도시락을 펴고 먹을 때 성호를 긋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성호를 그으면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남에게 밝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소한 말과 행동이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렇게 신앙인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보호막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밝히는 자세가 우선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광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가짐 하나, 말씨 하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을 밝히 드러낼 수 있게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박해를 당해서 신앙을 당당하게 증거하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추문거리가 되어, 예수님 얼굴에 또는 교회 얼굴에 먹칠하면서 살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신앙은 나를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구원까지 막아버리는 장애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우리가 들은 바를 펼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며, 우리의 영혼이 파멸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