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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토요일(2026년 5월 23일)

드디어 요한복음이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적으면 온 세상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분량의 책이 되리라는 말을 남기며 복음은 마무리가 됩니다. 솔직히 복음이 여기서 끝나 다행입니다. 더 이어졌다면 제 머리가 깨졌을 것 같습니다. 꼴랑 열 줄도 안 되는 복음 묵상을 쓰려고 어떤 날은 두 시간을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글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방대한 저작을 남기셨더라면 아마 저는 아직도 사제품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진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토라를 읽을 정도의 문해력을 갖추었으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심오한 말씀을 하실 정도로 유식한 분은 아닙니다. 대신에 공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농사짓는 이야기, 장사하는 이야기, 빵 굽는 이야기, 물고기 잡는 이야기 등 평범한 사람들의 대수롭지 않은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게 해줍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이 다 뻥이고 구라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믿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 곧 선행은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지 복음은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준 일이 바로 당신에게 해준 일이라고 가르치며 가난한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푼 선행이 바로 마지막 심판의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릴지 아니면 영원한 불의 처벌을 받을지 기준이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인들이 날카로운 예지와 심오한 혜안을 갖추고 예외 없이 가난한 사람의 인격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갈리아 지방, 그러니까 지금 프랑스에서 수도생활을 처음 시작한 투르의 마르티노 주교의 회심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성인은 세례를 받기 전에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아미앵에서 근무하던 성인은 어느 추운 겨울밤 말을 타고 성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성문 앞에서 성인은 헐벗은 채 벌벌 떨며 동냥하던 거지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칼과 입고 있던 망토밖에 없었던 성인은 칼로 망토를 두 쪽 내어 한 조각을 거지에게 입혀 주고, 나머지 반쪽만 걸친 채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날 밤 성인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망토로 나를 덮어 주었구나.” 예수님은 낮에 거지에게 준 그 망토를 걸치고 계셨고, 그 거지는 실은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녀는 자기 외투를 거지의 다 해진 겉옷과 바꾸어 입었습니다. 그 후 성녀는 환시에서 거지에게 준 외투를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그 외투에는 전과 달리 많은 보석이 박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인격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기 위해서는 자선과 더불어 깊은 신앙심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한 몰골을 한 예수님을 본 로마인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볼품이라고는 전혀 없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나병 환자처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또한 호화로운 헤로데의 궁궐의 옥좌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발견한 동방 박사의 분별의 지혜 역시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을 찾기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노숙자들도 부산역이나 가야 보입니다. 가난을 드러내는 건 수치이며 그 자체가 낙인이 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 궁핍을 쉽사리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가난한 이들을 찾으려면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이유의 결핍과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볼 수 있고 그 안에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동정 어린 눈이나 혐오감이 섞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우리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가난한 이들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연민으로 바뀌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더욱 확장하여 지구 전체로 돌리면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만 헐벗고 굶주리는 차원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 가르쳐줍니다. “노숙자, 중독자, 난민, 원주민, 이주민, 노인, 폭력에 노출된 여성,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노동 착취를 당하는 아동, 죄 없이 죽어가는 태아, 그리고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대자연.”

이제는 앞서 말한 새로운 차원의 궁핍을 겪고 있는 존재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무덤으로 향해 가는 우리의 어머니 지구 생태계를 살리기 위한 행동을 작은 것이라도 하나 실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