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아직도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때는 이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처럼 북녘의 산하를 예찬하는 노래들도 즐겨 불렀습니다. 물론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노래하며 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키웠지만, 통일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라는 사실에는 초등학생들까지도 반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한강에 홍수가 나던 해, 북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판문점을 넘어 서울에 당도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북녘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던 어느 재벌 총수가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장면도 눈에 선합니다. 먹고살 걱정이 없어지면 통일이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통일이라는 이슈가 국민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분단의 비극은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난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남과 북에서 각기 다른 이념과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공동체가 수립되었습니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들이 두 어머니를 모신 셈입니다. 그렇게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반목했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위한다며 차마 못 할 짓을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저질렀습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대립적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모순 또는 이율배반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식들을 전쟁으로 내몰겠으며 다른 형제를 해치라고 하겠습니까? 어머니의 속성은 자비(慈悲)입니다.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랑(慈)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연민(悲)은 어머니가 지니는 고유한 덕성입니다. 그러니 지난날 서로에게 입혔던 상처는 어머니 탓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자식들의 편협하고도 배타적인 시각이 큰 탓으로 작용합니다. 철모르는 아이의 눈에는 자기 어머니보다 예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슷한 수준끼리 싸웁니다. 아이와 다투면 아이가 되고 개와 싸우면 개가 되는 법입니다. 왜 그때 우리가 공존하고 공생할 넓은 안목을 지니지 못했는지 안타깝습니다. 너무 쉽게 상대방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외세의 식민통치는 36년이나 견뎠으면서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형제의 목소리는 단 3년을 못 참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분단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서로에게 남겼습니다. 상호비방과 대립경쟁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신경이 무디어진 듯합니다. 숫제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한때 활발했던 남북대화와 협력의 움직임도 멈춰버렸습니다. 두 평행선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길이 없는 게 아닙니다. 같이 사는 길을 찾는 과정은 늘 더디고 골치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일단 국권의 침탈부터 일제의 강점과 해방 그리고 분단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굴곡을 차분히 짚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치부를 감추어 미화하거나 과도하게 부풀리어 신화가 되어온 역사의 민낯을 인정하는 데서 용서와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식민지배와 이념의 갈등으로 발생한 각종 폭력이 규명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상처들이 치유될 때 우리는 서로 원수가 아니고 한 뿌리에서 나온 혈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지점이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통일은 화해와 용서를 소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인류의 평화와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도록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며 강론을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