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 하느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크든 작든 그건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만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이 시킨 심부름을 하러 잠시 이 지상에 몸붙여 살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맡은 심부름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가뿐하게 그 일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이런 분들은 세상 삶이 소풍 마냥 즐겁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시킨 심부름을 잊어버리고 세파에 휘둘려 정신없이 살다가, 죽고 나서도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며 떠돌아다닙니다. 이 심부름을 유식한 말로 사명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공개적으로 선포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일,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건강과 재물과 성공을 주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사명을 신학 용어로 그리스도의 예언직이라고 합니다. 봉사를 의미하는 왕직 그리고 흠숭과 예배를 의미하는 사제직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부여받는 공통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언직이란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란 모두가 웃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일, 더 나아가 그들을 울게 만드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는 일이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명에 비해 예언직 수행을 꺼려하고 회피합니다. 아마도 정의와 평화라는 두 단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정의와 평화라는 두 단어는 이상 세계의 단어라 늘 껄끄럽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불의에 맞서 싸우거나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정의의 실현을 지연시키고 거짓 평화와 타협하는 태도를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회보다 훨씬 나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곁에는 여전히 절망에 빠져 있는 가난한 이들과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 그리고 정의를 외치다가 억압받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언직의 실천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요구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언직 실천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악과의 단절, 불의와의 단절 그리고 폭력과의 단절. 이 단호한 결단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 건설의 사명을 완수하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고향마저 등지는 예수님의 결연한 태도가 이를 시사해 줍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기 위하여 무엇과 단절해야 하는지 되돌아보고, 정의와 평화 이 두 단어를 가슴에 품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