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9.6.연중 제23주일                                                                   에제33,7-9 로마13,8-10 마태18,15-20

주님을 중심한 일치의 공동체

“공동체, 사랑, 기도, 교정”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95,7ㄹ과 8ㄴ)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의 <경청>은 공동체 형성에 절대적 기초가 됩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의 인생 여정이요 서로가 구원합니다. 

성서의 말씀들만 봐도, 우리의 현실만 봐도 거의가 공동체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공동체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기리는 옛 자작시 두 편입니다.

“혼자서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한 송이만으로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더냐

 한 몸 여러 줄기에 

 송이송이 피어나지 않더냐

 홀로 떨어져 있어도 

 한 몸 안에 함께 있지 않더냐”<1999.8.22.>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대로 좋다

 모든 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다 좋다

 공존의 조화요 아름다움이다

 정주와 인내, 기다림의 나무들이다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무들처럼

 모두가 고유의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비교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라”<2007.9. >

어제는 많이 망설이던 중 수도형제의 격려에 힘입어 피정날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안드레아 사촌형님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그 많던 50-60명 사촌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이제 제가 서열 5째가 됩니다. 살아생전에 못 뵙고 마지막 죽어서라도 뵙고자 급히 다녀왔고 가톨릭 신자들인 친지들도 반가이 만났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하던지요! 새삼 하나로 연결된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날마다 이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수도공동체 품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강론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혼자만을 위해서라면 절대 매일 강론 못씁니다.

공동체 안에서 상처도 받지만 그 은혜는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공동생활을 통해 늘 겸손과 감사를 배우기에 공동체는 저에게는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사랑의 학교>입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 삶이 공동체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땅 있어 하늘이지 하늘 있어 땅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땅의 공동체를 떠나선 하늘에 이를 길이 없습니다. 땅의 공동체와 하나로 연결되었기에 땅의 공동체에서 먼저 풀어야 하늘 길도 열립니다. 다음 말씀에서 깨닫는 바 저절로 공동체가 아니라 기도와 사랑을 통한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늘 현존하는 주님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와 더불어 하늘길을 여는 공동기도입니다. 공동기도에 바탕한 개인기도가 건강한 기도입니다. 공동기도를 떠난 혼자만의 기도는 환상과 착각, 자기도취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사랑하라 주어진 공동체는 사랑의 훈련장이자 사랑의 학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데 혼자라면 누구를 사랑합니까? 애완견이 아니라 우선 사람을 먼저 사랑해야합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모두 이 한마디에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기초요 완성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인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내용을 나눕니다.

“누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우리 남매는 큰 집에 맡겨졌다. 나는 누나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번은 학교가 끝나고 막 돌아온 누나가 나를 보더니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얼마 후 눈을 뜨자 누나 손에는 붉은 알사탕이 있었다. 하굣길에 친구가 사탕을 하나 주었는데 일단 입속에 넣고 먹는 척을 하다 내게 줄 생각으로 몰래 사탕을 뱉은 다음 손바닥에 쥐고 돌아온 것이다. 그때 누나 손바닥에는 마치 붉은 신호등처럼 동그랗게 사탕 물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누나의 손바닥에는 그 붉은 사탕 물이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까닭에 나는 누나를 떠올릴 때마다 매번 진다.”<박준>

이런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런 사랑의 추억은 평생 가며 온갖 유혹에서 지켜줍니다. 그 누구도 이런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래서 인자무적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하며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정은 예외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공동체내에서의 교정을 강조합니다. 교정의 사랑이요 참 힘든 사랑입니다. 요약하면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에 있기에 최대한 절차를 밟으며 잘못을 교정하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공동체의 보호를 위해 이들을 내치라 하는데 하느님 손에 맡길 수뿐이 없습니다. 칭찬은 쉽습니다만 사심 없는 교정의 사랑은 정말 힘들며 저도 잘 못합니다. “교정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아주 옛 장상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어제의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수도생활 이후 끝기도후 한시간 전화상담하긴 처음입니다. 20년전 제 전화번호가 생각나 도움을 청한다는 메시지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10명의 노수녀님들 공동체로 5명은 80대, 5명은 70대요 모두가 환자라는 것이며 원장수녀의 횡포가 너무 커서 때로 감정 없이 충고하는데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참 반듯한 정의롭고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교정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 보기 드문 노수녀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무지한 폭력의 수녀들을 견제하며 약한 수녀들을 보호해 주는 수녀였습니다. 교회법에 어긋나지만 고도의 사목적 배려로 전화로 사죄경을 드리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참 잘 늙어가기가 쉽지 않아 사납고 거친 꼰대나 괴물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의 노년인생입니다. 그러니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무리 괴물이라 폐인이라 해도 그사람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의 모상>인 선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즐겨주는 보속은 일정기간 무조건 <자주 웃으며 평화롭고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교정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교정의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하느님은 이를 반드시 문책한다하십니다. 교정의 사랑! 결코 기분이나 감상의 값싼 사랑이 아니라 은총으로 가능한 분별의 노력과 지혜, 용기가 필요한 결단의 사랑입니다. 진정 친구는 이런 교정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회는 사랑 안에서 성체성사적 일치의 영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세.”(시편95,6)

경배와 무릎 꿇음이 없어 날로 빈약해지는 영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