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쓰고 삽니다. 차림새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옷차림을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옷차림은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스님들이 입는 가사와 장삼, 신부님들이 입는 수단 그리고 우리 수도자들이 입는 수도복이 그런 예들입니다. 옷차림은 또한 예절의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장소에 가고자 할 때 먼저 옷차림을 살핍니다. 문상을 갈 때는 검은 색 옷을 입고, 결혼식에는 화사한 옷을 갑니다. 또한 격식을 차리는 장소에는 항상 예복을 입습니다. 옷차림은 그 사람이 그 장소에 어울리는지, 정확히 말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 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비유에 나오는 임금이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손님을 쫓아 버린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어느 나라 왕자의 혼인 잔치에 비하고 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잔치에 갈까 하고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생계에만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기는커녕 귀찮아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오히려 거듭하여 초대하는 임금의 간청에 폭력으로 응합니다. 진노한 임금은 그들을 없애버리고, 이제는 몇몇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손길이 먼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닿았다가, 그들이 거부하자 다시 이방민족에게 다가간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옛적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했던 예언자들의 경고를 거부하고, 핍박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꾸짖으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특정 민족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기적으로 하느님을 먼저 알았던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언제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오늘도 하느님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 분의 현존 안에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말해 현재 진행형의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머리로만 알았던 하느님을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하여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며 살아가야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이 내면의 소리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당신 나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이 기쁘고 활기찹니다. 만일 우리가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이 기쁨으로 가득 차리라고 봅니다. 이런 삶은 쉽게 말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매일 같이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면의 소리 듣는 일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의 삶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손길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진정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예복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끝에 남기신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많지만 선택받은 이들은 적습니다.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초대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선택 받은 이들이란 바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찾아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례성사에서 받은 소명을 항구히 지키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마침내는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되고,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어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정진하며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