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서: 에페 3,2-12 <지금은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루카 12,39-48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제목: 맡겨진 은총과 섬김의 셈바침
1. 감추어졌던 구원의 신비
세상 사람은 저마다 자기 능력과 자격을 앞세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에페 3,8)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받은 사명을 겸손하게 밝혔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신비’는 머리로만 따지는 어려운 생각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난 실제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른 민족들도 복음을 듣고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에페 3,6) 됩니다.
교회는 이 구원의 신비를 그저 말로만 전하는 곳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직접 전하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도 생활과 봉헌의 삶 또한 내 힘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은총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향한 온전한 섬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
이렇게 거저 받은 은총은 우리에게 겸손한 책임을 요청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집사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이 말씀은 교회의 사목자들은 물론, 공동체 안에서 소임을 맡은 모든 이에게 참으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충실하고 지혜로운 집사’는 주인의 빈자리에서 제멋대로 힘을 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식솔들에게 성체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참된 영적 양식을 제때에 정성껏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원장이나 당가, 주방 봉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임자는 형제들이 상심하거나 낙담하지 않도록 일상의 작은 필요를 차별 없이 살피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주인이 늦게 온다 하여 동료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지내는 악한 종은 직분을 제 사리사욕의 도구로 삼은 자들입니다. 이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권력을 제멋대로 쓴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될 엄중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3. 매일의 셈바침과 깨어있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은총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시간과 건강, 각자의 소임과 모든 은총은 내 소유가 아니라, 훗날 하느님 대전에서 낱낱이 계산해 드려야 할 소중한 위탁물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태도가 아닙니다. 매일 바치는 전례 안에서 정성껏 기도하며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오늘 하루 나에게 맡겨진 일상의 소임에 성실을 다하는 삶입니다. 집주인이 도둑의 시각을 알지 못하듯,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찾아옵니다(루카 12,40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에페 3,12 참조). 거저 받은 은총을 내세움 없이 형제들의 밥상 위에 사랑으로 내려놓으며,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