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서: 에페 3,14-21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제목: 참된 평화와 십자가
1. 타오르는 불길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우리는 연륜이 쌓일수록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조용히 넘어가는 것을 삶의 지혜라 여깁니다. 둥글게 살며 갈등을 피하는 익숙한 일상에, 주님은 묵직한 돌을 던지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던 참혹한 수난과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성령의 불길이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무거운 중압감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셨습니다.
2. 거룩한 결단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단호한 말씀은 주님이 평화 자체를 배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진리는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는 미지근한 타협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분열은 악의적인 불화가 아닙니다.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갈 때 겪어야 하는 신앙적 시련이자 결단입니다. 이 거룩한 선택은 때로 가장 친밀한 가족 관계 안에서도 피할 수 없는 대립을 만들어냅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핏줄과 유대에 얽매여 진리를 굽히지 말고, 자유롭게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3. 우주적 십자가
이 무거운 결단의 길을 걷게 하는 힘은 오직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오로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8-19) 성 아우구스티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 네 가지 차원이 온 우주를 품어 안으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십자가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뻗어 나감은 저승의 깊은 곳부터 하늘 높은 곳까지 세상을 감싸 안으며, 신약 전례의 우주적 차원을 장엄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의 제한된 지성을 뛰어넘는 이 신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으로 채워집니다.
진리를 선택하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마찰이 따릅니다. 그러나 우주를 품으신 주님의 현존은 그 모든 대립의 순간에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위로와 십자가의 굳건한 연대 안에서, 주님의 변치 않는 자비에 기대어 참된 평화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